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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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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저 아득한 은하수를 향해 폴짝!]]></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copyright>Copyright(c) empas corp. All Rights Reserved.</copyright> 
		<pubDate>Sat, 30 Aug 2008 20:08:06 +0900</pubDate>
		<item>
			<category><![CDATA[웅얼]]></category>
			<title>죽을병에 걸렸다</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9637239</link>
			<description><![CDATA[예전 같으면 내 병에 대해 이렇게 말들을 했으리라. 

“죽을병에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있다. 물론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러나 이 병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벌써 많이 나았다. 기분으로는 거의 다 나은 듯하다. 

                                                                  * 

(이하, &amp;lt;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amp;gt;에서 끌어옴.)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원해서 참전한다.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한 애국적 동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동기가 전혀 없지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아주 부차적인 것이었을 거다. 후방에 배치된 그는 계속해서 전방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후방을 전전하던 비트겐슈타인은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러시아 전선에 있는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다. 최전방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기도했다. 

‘나의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임무를 맡게 해주소서.’ 

최전방에 도착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적의 포화의 목표가 될 가장 위험한 곳인 관측소에 배치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는 썼다. 

‘……심지어 인생도, 아마도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면 생명의 빛이 나에게 올지 모른다.’ 

관측소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신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 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로지 죽음만이 인생에 의미를 준다.’ 

                                                                    * 

비트겐슈타인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지만, 나 역시 죽음과 맞대면하는, 바짝 근접거리에서 맞대면하는 삶의 순간을 꿈꾼 적이 있다. 꿈꿨다기보다는 어쩌면 예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대와 두..]]></description>
			<pubDate>Sat, 19 Jul 2008 00:46:37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예술]]></category>
			<title>중단되는 음악?</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8721271</link>
			<description><![CDATA[Chausson,Ernest (1855,1,20- 1899,6,10 불란서)
Poeme Op.25
violin - Ginette Neveu

 
 (음악이 나오지 않는 경우, 다음 주소를 클릭할 것.. 
http://blog.naver.com/gold9055/10023337234)
 
 
 
(물론 쇼송의 &amp;lt;시곡&amp;gt;은 중단없이 이어집니다..) 

 
 

나치의 SS보안방첩부(SD) 수장으로서 한때 게슈타포와 국가보안본부까지 지휘하기도 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홀로코스트’, 다시 말해 유태인 대학살의 입안자였습니다. 생전에 그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이드리히는 힘든 일과를 마친 후에는 항상 자신의 동료들과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현악사중주는 서양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장르가 아닐까 합니다. 처음 제가 현악사중주라는 장르의 음악을 들었을 때(아마 베토벤이었을 겁니다), 폐쇄공포증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좀 갑갑하더군요. 동종의 악기들끼리 하모니를 펼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순수한’ 음악 만들기라는 점에서 현악사중주는 뛰어나지만, 그만큼 폐쇄적인 느낌, 갑갑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왜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들었을까요? 혹시 밖에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고는, 베토벤의 순수한 음악을 들으면서 손에 묻은 피를, 마음속까지 배어있는 피 냄새를 지우려 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자신의 도살자적인 정신을, 영혼을 정화시키려고 한 것일까요? 




글쎄,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겠죠. 어쩌면 하이드리히 자신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분명한 것은, 하이드리히의 진실은, 음악을 듣고 정화되는 그 주관적인 느낌이나 내면의 정서에 있는 ..]]></description>
			<pubDate>Sat, 24 May 2008 19:36:38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웅얼]]></category>
			<title>YH에게</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8665047</link>
			<description><![CDATA[YH에게 


  지난 일요일엔 원래 너와 함께 산에 가기로 했었지. 새벽부터 비가 왔고, 나는 너에게 비가 와서 산에 못 가겠다는 문자를 넣었지. 그런데 10시쯤 그럭저럭 비가 그쳐서 나는 혼자 산으로 향했지.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비가 내렸지. 나는 낯익은 세탁소 처마 밑에서 비를 그었지. 한때 내가 살았던 집 골목 입구 맞은편에 있는 세탁소였지. 앞에 보이는 수퍼가 그때도 있었나, 나는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었지. 그래, 그때도 있었다. 나이 많은 노친네 부부가 운영했는데, 가끔 딸들이 봐주곤 했었을 거야. 일찍 문을 닫아버려서 종종 조금 늦은 밤이면 나는 더 아래 수퍼로 맥주 같은 걸 사러가곤 했지……. 
  다시 나는 아주 가는 비를 맞으며 산으로 향했지. 다행히 비가 멎었고, 나는 우리가 자주 다녔던 코스 중간에서 유턴해서 골짜기로 내려왔지. 산에서 거의 다 내려올 즈음 다시 비가 내렸고, 빗방울이 굵어졌지. 5월 푸르른 잎들이 우산이 되어주긴 했지만, 그래도 잠시 잎이 빽빽이 하늘을 가린 나무 아래서 비를 그었지. 너도 알겠지만, 많은 생각들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잠시 눈물짓기도 했지. 막연히 이것도 하나의 연기가 아닐까(그렇다면 누구-지젝이라면 대타자라고 했겠지만-를 향한 연기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비가 그쳐 산을 벗어나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을 내려올 때, 다시 비가 내렸지. 이번엔 천둥 번개까지 쳤지. 나는 ‘CCTV 촬영 중’이라는 경고문이 써 붙여진 어느 원룸 빌딩 입구에서 세 번째로 비를 그었지. 또 생각에 잠겼지. 그러면서 죽음의 가능성과 바짝 근접거리에서 대면하는 자는 이렇게 하염없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법인가보다, 생각했지. 생각에 대한 생각, 메타생각이었지……. 
  어제는 나뭇잎과 ..]]></description>
			<pubDate>Wed, 21 May 2008 18:55:09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문화3]]></category>
			<title>TV드라마 신화의 탄생?</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4411480</link>
			<description><![CDATA[예전 신문을 뒤적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인터넷 한겨레에서 퍼왔음.)
 
&amp;lt;마량의 신기한 붓&amp;gt;=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족의 전설적인 영웅 이름에서 따왔다. 이 영웅의 이야기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주몽 이야기와 똑닮았다. 어릴 적 친왕(황제의 아들이나 형제)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채 자란 울란 바토르(붉은 영웅)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친황에게 채찍을 휘두르다 우물 속으로 떠밀려 지하세계로 떨어지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고난을 딛고 친왕에게 복수한다. 중국 한족과 몽골족의 전래동화를 묶었다. ‘세계의 전래동화’ 시리즈 첫번째 책. 엄해영 엮음·김혜영 그림/상상박물관·9000원.
 
붉은은 글씨로 된 '친황'에 대해서 한마디하고 넘어가자. 종이신문에는 '친왕'으로 돼있다. 당근 '친황'은 오타다. 왜 종이신문은 교정이 돼있는데, 인터넷판은 교정이 안 돼있을까? 
 
아직도 종이신문은 한번 찍혀 나오면 되돌릴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그 물질적 현존으로 인터넷판에 비해 더 무게감이 있어 보인다. 반면 인터넷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언제든지 삭제가능하며, 수정될 수 있다. 그래서 종이신문에 더 신경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더구나 인터넷판은 무료인데, 종이신문은 돈(구독료 혹은 가판대금)을 받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옛 기사를 찾아보려면 종이신문을 뒤적일까 인터넷판을 뒤적일까? 종이신문보다 오히려 인터넷판을 더 신경써야 하는 거 아닌가. 종이신문이 나온 후 인터넷판 최종교정을 한번 더 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 종이신문에선 교정이 돼있는 것을 인터넷판은 교정이 안 돼 있다면 문제가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오탈자가 아니라 내용 수정이라면 더욱 문제가..]]></description>
			<pubDate>Wed, 31 Oct 2007 16:59:17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주절]]></category>
			<title>Mysteries of Love</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4281332</link>
			<description><![CDATA[-Mysteries of Love-
 
 
전에 다니던 회사에 생년월일이 똑같은 놈이 있었다. 함께 야근을 하고, 술을 먹고, 그리고 그 녀석의 집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영화, 즉 데이비드 린치의 &amp;lt;블루 벨벳&amp;gt;을 처음 봤을 것이다. 한글 자막도 없는 테이프를, 녀석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참 후에 한글 자막이 있는 것을 봤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amp;lt;블루 벨벳&amp;gt;에는 좋은 노래가 많이 나온다. 아흐윽, 그 위대한 음악들.. 이 영화의 타이틀 곡이 된 &amp;lt;블루 벨벳&amp;gt;, 케티 레스터(Ketty Lester)의  &amp;lt;Love Letters&amp;gt;, 이 블로그 어딘가에도 있는, 뭔가 좀 도착적인 냄새가 나는 &amp;lt;in Dreams&amp;gt;, 그리고 그런 도착적인 욕망과 폭력의 끝에 도달한 순수한 &amp;lt;사랑의 신비&amp;gt;..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주체의 행위이기 때문에 신비하다. 이것이 첫 번째 사랑의 신비다. 
 
카일 맥라클란이 훔쳐보는 데니스 호퍼와의 그 '원초적 장면(primal scene)'과도 같은 사도매저키스트적 정사신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그 향락(라캉은 향락과 쾌락을 구분했다. 바로 아래 주를 볼 것)의 표정, 그 몸짓..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마치 폭풍이 지난 후처럼 울새의 신화적인 노래가 행복하게 울펴퍼질 때의 그 완벽하게 순결한 모습.. 그것은 동일한 두 얼굴이 아닌가? 사랑의 두 얼굴, 이것이 두 번째 사랑의 신비다.  
 
[주] &quot;위험부담이 없는 부적절한 정사(情事)는 단지 쾌락에만 관계할 뿐이지만, &quot;교수대에 대한 도전&quot;처럼--위반의 행위로--경험되는 정사는 향락을 불러일으킨다. 향락은, [가령 예를 들자면] 우리의 쾌락이 금지된 금지된 영역으로의 진입에서 오는 전..]]></description>
			<pubDate>Thu, 25 Oct 2007 03:43:31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주접]]></category>
			<title>물뱀이 누군가를 잡아먹는 꿈을 꿨다.</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803267</link>
			<description><![CDATA[-&quot;Twin Peaks&quot; 中 &quot;Into The Night&quot;-

 
 
 
작은 개울이었나 좁은 수로였나. 우리는 한 명씩 줄지어 헤엄쳐 내려가고 있었다. 초중딩 친구들 같기도 하고 고딩 동창들 같기도 했다. 내가 맨 앞이었다. 갑자기, 무슨 이유인진 기억나지 않지만, 아니 걍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문득 나는 대열을 이탈해서 물 밖으로 기어올라왔다. 바로 그때 뱀 한 마리가 물의 흐름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왔다. 그리고는 내가 있는 자리를 소리없이 지나쳐갔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풀색이 감도는 물뱀인 듯했는데,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소름이 돋는 듯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살짝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음메, 내가 물 속에서 저 뱀과 마주쳤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현실보다 꿈속에서 뱀이 더 징그럽고 무섭다. 그런 생각의 이미지가 접혀 있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펼쳐지는 것이다. 원초적 지층 깊이 접혀 있다가 스르르, 펼쳐지는 징그러운, 혹은 아름다운, 그 곡선의, 몸짓, 스, 르르르........ 
 
빠르게 내 눈앞을 지나간 뱀이 나 바로 다음으로 헤엄쳐 내려오던 아이에게 덤벼들었다(처음엔 분명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중, 고교 동창이었던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가물 하다 못해 깜깜해졌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누워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보면 알아낼 수 있을 듯도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때론 망각이 필요하다). 녀석을 친친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앗! 저! 저! 저! 저! 저! 나는 목구멍에 눌러붙은 묵음을 토해내며 발을 굴렀다. 그러다 물에 뛰어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꿈을 꾸는 자로서 나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였다. 그리고 나는 뱀을, 특히 물뱀을 두려워한다. 모르..]]></description>
			<pubDate>Mon, 01 Oct 2007 10:54:05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씨부렁]]></category>
			<title>대중</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648852</link>
			<description><![CDATA[-&quot;Last Exit to Brooklin&quot; 中 &quot;A Love Idea&quot;- 
 
 
 
'대중(mass)'은 이름붙일 수 없는 무정형의 다수에 대한 이름붙임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떠 어떠한 사람들이 대중인가'라고 묻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대중일까? 
 
야구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중이다. 가령 그 속에 무슨 대단한 자본가가 있다고 해도 그 순간 그는 관중-대중을 구성하는 익명의 한 신체인 것이다. 이 무정유가 혹 무슨 개뼉다구라 해도 그 야구장에 있다면 역시 그렇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 &amp;lt;태왕사신기&amp;gt; 재방송을 하는 티비 화면 앞에 모인 사람들은 대중이다. 노무현이나 이건희가 혹 &amp;lt;태왕사신기&amp;gt;를 보고 있다면 그들 역시도 그 순간은 시청자 대중을 구성하는 익명의 신체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단지 '대중'이라는 것을 갖고 말장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걸까? 노! 네버! 결코 그렇지 않다. 이번 &amp;lt;디 워&amp;gt; 소동과 관련해서 소위 평론가들을 비판, 비난했던 사람들이 평론가 vs 대중이라는 상상적 구도 속에서 '대중'의 편에 서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대중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해주는 것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보자. 이송희일 감독에게 2억 원을 투자할 테니 &amp;lt;디 워&amp;gt; 같은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비아냥댔던 어느 자본가(중소기업을 운영한다던) 역시 대중이다. 그가 '자본가(xx기업사장)'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자신의 개별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가령 중소기업 사장으로서 중소기업 정책에 대한 글)을 쓴다면 몰라도, 최소한 &amp;lt;디 워&amp;gt;와 관련된 이 경우 그는 그저 대중을 구성하는 익명의 한 신체에 불과하다...]]></description>
			<pubDate>Sat, 22 Sep 2007 07:09:51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씨부렁]]></category>
			<title>이무기</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648791</link>
			<description><![CDATA[(&amp;lt;디 워&amp;gt; 엔딩에 나오는 아리랑. 들으려면 화살표 클릭.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그 원망이, 원한이 오랜 시간을 곰삭아 한이 된 노래. 슬픔의 신체를 사를 때 때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지는 액즙 같은 노래.)

 
 
 
이무기는 승천을 꿈꾸는 욕망의 존재다. 그러한 욕망이 좌절될 때 그것은 원한의 존재가 된다. 그러한 원한이 세계에 대한 의식과 자기의식을 획득할 때 반역의 존재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이무기는 '한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의 존재로서의 이무기는 한반도 민중들의 집단무의식적인 자기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 수천 년을 역사라는 강의 맨 밑바닥에 웅크려 살면서 여의주 하나 물어 승천하는, 그 불가능한 꿈. 
 
사실 그들이 흘린 눈물만 모아도 이무기 몇 마리 웅크려 살기에 족할 만큼 커다랗고 긴 강 하나쯤은 흐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강물 같은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요즘은 이무기도 부박해진 시대의 기류를 타고 틈만 나면 물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공들여 여의주를 키우기보다는 '바다 이야기'에 풍덩 빠지거나 로또라는 기연을 만나 일거에 여의주를 물어오겠다는 것이다. 
 
딱하다. 하지만, 한탕주의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한탕주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물론 대개는, 아니 99.9..%는 실패하겠지만), 그들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 
 
                                                                *
 
때로 이무기는 때~한민국의 집단무의식적인 자기표상이기도 하다. 그 무의식 속에 웅크려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무기 역시 여의주를 손에 넣어 용이 되어 ..]]></description>
			<pubDate>Sat, 22 Sep 2007 07:02:57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영화]]></category>
			<title>D-War : 김규항의 진중권 비판 문제 있다.</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297003</link>
			<description><![CDATA[(물론 이 글의 진짜 목적은 김규항의 글을 계기로 취향과 비평의 문제에 대해 개똥철학적으로 함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자칭 'B급 좌파'라는 김규항이 &amp;lt;디 워&amp;gt; 소동과 관련해서 진중권을 의식해서 쓴 것이 분명한 &amp;lt;타인의 취향&amp;gt;을 읽어보면, 그는 오히려 교과서적인 말이나 되뇌는 '범생이 좌파'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우선 다음과 같은 김규항의 말을 들어보자. 
 
&quot;&amp;lt;디워&amp;gt; 문제가 간단치 않은 건 비슷하게 언급되는 다른 사건들(이를테면 황우석 사건)과는 달리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술엔 맞다 틀리다, 혹은 옳다 그르다라는 게 없다. 취향이 있을 뿐이다. 예술이란 나에겐 천상의 아름다움인 게 다른 사람에겐 하품만 나오는 것일 수도, 나에겐 쓰레기인 게 어떤 사람에겐 삶의 위로일 수 있는 것이다. 만명에겐 만개의 취향이 있다. 천박한 취향은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도 아닌, 고전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을 듣는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에게 있다.&quot; 
 
【김규항의 글 전문 : &amp;lt;타인의 취향&amp;gt;(원래 한겨레21에 실림) 
http://jinbonuri.com/bbs/zboard.php?id=fight_board2&amp;amp;page=1&amp;amp;sn1=&amp;amp;divpage=18&amp;amp;sn=off&amp;amp;ss=on&amp;amp;sc=on&amp;amp;select_arrange=headnum&amp;amp;desc=asc&amp;amp;no=103953】 
 
 
1. 김규항의 혼동 
 
 
이에 대한 무정유의 촌평은 이렇다 : '김규항의 취향 운운은 한마디로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왜 빗나간 것인가? 
 
취향의 문제와 비평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말대로 라면, 어떤 예술작품을 비판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좋아..]]></description>
			<pubDate>Tue, 04 Sep 2007 10:22:25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예술]]></category>
			<title>죽음의 섬에 가고 싶다.</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162059</link>
			<description><![CDATA[-Arnold Bocklin, &quot;The Isle of the Dead&quot;- 
 
 
가서 한 며칠 죽었다 왔으면 좋겠다. 
 
 
죽음의 섬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얗게 지워진 자이다. 나올 때는 그 하양마저도 비워져야/비워내야 한다. 다 게워내서 등과 배가 맞닿듯 짜부러진 나=나, 그 절대적 주체의 고독한 순간! 
 
그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나=나를 헤집고 들어오는 너는 여전히 너일지라도 이미 다른 너일 것이다. 여전히 나인 내가 이미 다른 나이듯...... 진정한 시적 순간은 이렇게 탄생한다. 
 
 
덥다, 아직. 이 더위마저 비워내는 죽음의 섬에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피서나 하고 왔으면 좋겠다. 혹은 나는, 가을을 기다리는 것일까? 
 
 
無情遊.
 
 
  
-S. V. Rachmaninov, &quot;The Isle of the Dead&quot;-]]></description>
			<pubDate>Tue, 28 Aug 2007 14:16:44 +0900</pubDate>
		</item>
		<item>
			<category><![CDATA[궁시렁]]></category>
			<title>자칭 문명비평가에 대한 기억</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025636</link>
			<description><![CDATA[*자칭 문명비평가인 무위(본명 김ㅎㅇ)라는 사람의 글을 읽고 쓴 것입니다. 엄청나게 자가발전을 많이 하는 인간인데, 자칭 '문명비평가'였던 그는 요즘은 '문화평론가'로 스스로 격을 좀 낮췄더군요. 세상에 이런 날파리 같은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인터넷이란 것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혹은 늘 그랬던 욕망을 새로운 방식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인지..*
 
 
                             =================================================
 
 
이름      무정유  (2004-05-20 20:59:15, Hit : 192, 추천 : 9)   제목      무위라는 돌은 언제 잠 깨려는가?   
(이런 글 썼다고 무정유를 진빠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
'무위'는 '무식과 위선'의 준말이라고 들었다. 나는 궁금하다. 지가 무식하고 위선적이라는 말인가? 그렇담 내가 볼 때 참 잘 지은 필명이다. 뭐 무정유는 그 차원을 넘어섰다만. '무정유'란 필명은 너나 나를 보듬고 넘어선다. 너와 나, 우리 서로 무정유(無情遊)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무위' 즉 '무식과 위선'이 다른 이들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한마디 해주고 싶다. 어이 무위, 니 주제부터 먼저 챙겨라~. 진정한 고수는 필명 하나를 짓더라도, 그를 통해 자신의 그 억제할 수 없는 권능의지를 드러내는 법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 자신을 겨냥하는 치열한 것이어야 한다. '무식과 위선'이라는 게 만약 불특정 다수의 다른 이들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파렴치한 작태이며 노예도덕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련한 짓거리다. 
 
저 아래 무위가 진중권을 씹었다. 무위가 누굴 씹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진중권은 나도 한두 번 찔러본 적이 있으므로, 무위라고 못할 게 뭐냐? 그러나 수준 차가 있다. 무위처럼 ..]]></description>
			<pubDate>Tue, 21 Aug 2007 11:09: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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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궁시렁]]></category>
			<title>어느 박정희주의자를 갖고 놀던 기억</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024497</link>
			<description><![CDATA[*전에 진보누리에 쓴 글임. 무위(본명 김ㅎㅇ)라는 자칭 문화평론가로서 '자가발전'하는 어떤 인간을 씹어주는 글을 찾다가 시대유감이라는 자에게 쓴 이 글을 읽게 됐는데, 나름대로 웃김. 아마 그때 내가 할일이 참 없었나 본데.. 저 시대유감이라는 인간은 무슨 필명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 검색해보니, 최근에 오랜만에 &amp;lt;디 워&amp;gt;에 대해서 진보누리에 글을 쓴 것을 알았다. 흠.*
 
(시대유감의 글 : &amp;lt;노빠와 김대중 광신도를 위한 사회과학 강의..&amp;gt; http://jinbonuri.com/bbs/zboard.php?id=fight_board2&amp;amp;page=1&amp;amp;sn1=&amp;amp;divpage=9&amp;amp;sn=on&amp;amp;ss=off&amp;amp;sc=off&amp;amp;keyword=시대유감&amp;amp;select_arrange=headnum&amp;amp;desc=asc&amp;amp;no=46834)
 
 
 




이름  




   무정유 
(2005-08-30 01:46:12, Hit : 167, 추천 : 8)



제목  
   시대유감의 머리유감(1) : 과도한 일반화














 
시대유감이 쓴 &amp;lt;노빠와 김대중 광신도를 위한 사회과학 강의..&amp;gt;을 읽게 됐다. 소시적부터 사회과학에 무척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는 그 글을 통해 시대유감이 이 시대의 대단한 머리유감임을 깨달았다. 시대유감의 유감없는 머리유감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해보겠다. 1. 시대유감의 첫 번째 머리유감 : 과도한 일반화시대유감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 가는 첫 번째 토대는 미국의 머시기 대법관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자유에 대한 진정한 위험은 동기는 훌륭하나 무식한 열성분자들이 알게 모르게 자유를 잠식하는 데 있다..” (명제A)일단 문장이 좀 어색하다. 또 동어반복 비슷하다. 자유를 잠식해서 자유에 대한 위험이 된다는 구조니까..]]></description>
			<pubDate>Tue, 21 Aug 2007 10:28:0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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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궁시렁]]></category>
			<title>ing : 좌파에 대한 열등감은 현재진행형?</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3022543</link>
			<description><![CDATA[(전형적으로 배보다 배꼽이 큰 글을 보여주고 싶다. 사실, 내가 좌파인지 우파인지 중도인지, 그밖의 또 다른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 이름표에 별 관심도 없고.)
 
 
  
 
 
 
이 무정유에게 진보누리는 잊혀진, 잊혀졌기에 조금은 심상하게 들르는 첫사랑의 '알테 리베'와 같은 곳이다. 
 
언젠가 'ing'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무정유와 인드라를 묶어 둘에게 질문을 한 것을 보았다. 아마 박남철 시인에 대한 것이었을 거다. (http://jinbonuri.com/bbs/zboard.php?id=free_board&amp;amp;page=1&amp;amp;sn1=&amp;amp;divpage=9&amp;amp;sn=on&amp;amp;ss=off&amp;amp;sc=off&amp;amp;keyword=ing&amp;amp;select_arrange=headnum&amp;amp;desc=asc&amp;amp;no=60127). 
 
내 느낌은 우선 &quot;재수 없다&quot;는 것이었다. 그 다음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물음을 ing는 진보누리 쟁토실, 누리카페, 피플타임즈 등에 (반복)게재했다. 마치 자신의 중대한 질문을 무정유나 인드라가 보지 못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그런데 왜 재수 없다는 건가? 왜 이 무정유는 ing의 저 글을 재수없다고 생각했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무정유는 인드라 같은 인간을 참으로 같잖게 생각한다. 뭐 그래도 하누리보다는 인드라가 낫지만. 그렇더라도 인드라의 옆자리에 무정유를, 혹은 무정유의 옆자리에 인드라를 나란히 놓는 것은 내겐 정말 좆같은 일이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걍 좆같고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드라가 그래도 하누리보단 낫지만, 좆같은 건 좆같은 거다.
                                                   ---------------
 
&amp;lt;주&amp;gt;
 
인드라  : 10여 년 전, 30대 초반에 문화..]]></description>
			<pubDate>Tue, 21 Aug 2007 08:52:4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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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사회1]]></category>
			<title>광복절, 이제 그만 폐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2919336</link>
			<description><![CDATA[일제의 지배 기간은 35년이었지만, 그후 62년이 흘렀다. 도대체 앞으로 언제까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경축해야 할 것인가?
 
 
미국 독립기념일과 대한민국 광복절을 비교해보자.미국은 식민지 본국 영국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해냈다. 더구나 그것은 그리피스(D. W. Griffith)의 고전적인 영화 제목 'The Birth of a Nation'처럼 그전까지는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nation의 탄생이었다('The Birth of a Nation'은 흔히 '국가의 탄생'이라고 번역되지만, 여기서 nation은 국가와 그 국민 모두를 뜻한다).  
 
따라서 독립을 쟁취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후예로서 미국의 주류 백인들에게는 모 독립이란 것이 기념하고 경축할 만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건 미국이라는 국가의 건국 사건이면서, 그에 따른 '미국인'이라는 국민의 탄생 사건이기도 하니까. 물론, 미국의 백인 지배층들이 떠들썩하게 독립을 자축하는 것은 그 이면을 이루는 원죄, 즉 아메리카 인디언을 사냥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완전 날강도-학살자의 역사를 지우려는 제스처이기도 하겠지만.
대한민국의 광복절은 어떤가.소위 광복은 주어진 것이다. 그때까지 독립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중국 대륙에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해방은 미소 연합군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고, 이후 분단으로 이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 그 자체만으로는 특별히 경축할 만한 것도 아니다.물론 수동적인 것일망정 그 해방이 3년 후 8월15일의 건국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보다 능동적인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건국이란 것도 다른 한편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의한 ..]]></description>
			<pubDate>Wed, 15 Aug 2007 17:57:43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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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영화]]></category>
			<title>&amp;lt;디 워&amp;gt;를 둘러싼 소란의 본질 : mbc 100분토론을 보고</title>
			<link>http://blog.empas.com/moozakey/22818058</link>
			<description><![CDATA[*심형래 감독의 &amp;lt;디 워&amp;gt;를 둘러싼 네티즌들의 행태를 비판한다고 해서 이 무정유가 그 반대편에 있는 '평론가들'(이송희일, 김조광수, 진중권 씨 등을 아우르는)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근본적인 시각, 혹은 일반 대중들의 시각과 다른 점('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똑같은 말도 정반대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반 영화팬이나 관객들을 대하는 평론가들의 (여전히 일방적으로 계몽주의적인?) 태도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는 것 같다. 솔직히 이 무정유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오히려 이런 문제들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함 살펴볼까 말까 한다.*
 
 
                                      ---------- O ---------- O ----------
 
좋아하는 인물이나 대중문화 작품에 대해 누군가 비판을 하면, 네티즌들이 몰려들어 다구리 놓듯 욕설을 하고 악담을 해대는 것은 이제 사우스 코리아의 '온라인 풍토병'이 돼버린 듯하다. '황우석 사태'는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심형래 감독의 &amp;lt;디 워&amp;gt;를 둘러싼 소란에서 문제의 발단과 본질도 바로 그러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풍토병'에 있다. (그래선지 소위 '디빠'들은 '디까'와 '황까'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맞은편에선 물론 '디빠'와 '황빠'가 완전히 같은 핏줄이라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일 것이고.)
 
이러한 소동에서 &amp;lt;디 워&amp;gt; 자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이 소동과 관련해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amp;lt;디 워&amp;gt;가 컴퓨터 그래픽(CG) 기술은 훌륭하지만 이야기 구조가 허술하다는 것은 그 영화의 옹호자도 비판자도 다 알고 다 인정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도의..]]></description>
			<pubDate>Fri, 10 Aug 2007 08:15: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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